취미는 독서/밑줄긋기

에디톨로지, 김정운

멀랜다 2017. 8. 2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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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톨로지





에디톨로지(editology). 창조는 곧 편집이다.  21세기 가장 창조적인 인물로 꼽히는 스티브 잡스의 탁월한 능력은 '편집 능력'이다. 저자는 에디톨로지에 대한 내용을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다고 한다. 이후 말콤 글래드웰이라는 미국 작가가 워싱턴포스트에 '편집(editing)'이야말로 스티브 잡스식 창조성의 핵심이라는 내용을 기고한다.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기존의 제품을 개량해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는 편집 능력에 있다"는 주장이다.



김정운 억울해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영어권을 벗어난 주변부 지식인의 주장은 주목받지 못한다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에디팅이 아닌 에디톨로지다. 어설픈 '에디팅'과는 차원이 다른 이론이라는 것이다.



"에디톨로지는 그저 섞는 게 아니다. 그럴듯하게 짜집기하는 것도 물론 아니다. '편집의 단위' 편집의 차원'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인식의 패러다임 구성 과정에 관한 설명이다"



그의 패기에 박수를 보낸다.







프롤로그 | 편집된 세상을 에디톨로지로 읽는다 
PART 01. 지식과 문화의 에디톨로지

01 왜 에디톨로지인가?


에디톨로지는 다시 말해 '편집학'이다. 세상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이 모든 과정을 나는 한마디로 '편집'이라고 정의한다. ... 이 같은 '편집의 방법론'을 통틀어 나는 '에디톨로지'라고 명명한다. ... 내가 이야기하고픈 에디톨로지는 인간의 구체적인 편집 행위에 관한 설명이다.

p. 24


세상의 모든 창조는 이미 존재하는 것드의 또 다른 편집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도 없다! '창조는 편집이다.'

p. 26


02 창조의 본질은 낯설게 하기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 상상도 못하는 것은 절대 생각해낼 수 없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들, 들은 적 있었던 것들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인지발달 심리학자 피아제는 생각의 본질을 '표상'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presentation', 즉 '보여주다'라는 의미에 반복을 뜻하는 're-'가 붙은 것이다. '다시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생각이란 어디서 한 번은 본 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떠올리는 것을 뜻한다.

p. 32


생각의 본질이 '어디선가 본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라면, 창의적 사고란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p. 33


창조적 사고는 이 같은 일상의 당연한 경험들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된다. 이를 가리켜 러시아 형식주의의 대표적 이론가 시클롭스키는 '낯설게 하기'라고 정의한다.

p. 35


창조의 개념이 사용되는 맥락을 잘 분석해보면 주로 미학적 차원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롭다' 혹은 '창조적이다'라는 표현은 주로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무엇'과 관련되어 있다.

p. 38


03 지식권력은 이제 더 이상 대학에 있지 않다


정보가 부족한 세상이 아니다. 정보는 넘쳐난다. 정보와 정보를 엮어 어떠한 지식을 편집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인 세상이다. ... 예전에는 많이, 그리고 정확히 아는 사람이 지식인이었다.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정보를 외우고 있으면 천재 대접을 받았다. ... 오늘날의 지식인은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잘 엮어내는 사람'이다. 천재는 정보와 정보의 관계를 '남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엮어내는 사람'이다.

p. 43


지식 편집의 권력이 바뀌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1년에 1,000만원 가까운 등록금을 내고 배워야 하는 대학 강의의 대부분은 이제 아주 간단한 인터넷 검색으로 얼마든지 보고 들을 수 있다.

p. 50


이제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지식 구성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 '에디톨로지'에 기초한 '하이퍼텍스트'시대, 즉 탈텍스트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p. 51


04 누구나 천재가 될 수 있다. 쥐 때문이다!


천재와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이 마구 건너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무지 쫓아가기가 어렵다.

p. 52


날아다니는 생각은 천재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또라이'의 특징이기도 하다. 천재와 또라이는 종이 한 장 차이다. 천재는 날아다니는 생각을 잡아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또라이는 그렇지 못하다. 생각이 그냥 계속 날아간다. 자신의 생각이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마구 날아간다.

p. 54


마우스의 특허권을 가지고 있던 스탠퍼드 연구센터는 마우스의 활용분야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 수년 후, 고작 4만 달러를 받고 애플 사에 마우스의 특허권을 넘겨버린다. 잡스가 위대한 것은 아무도 몰랐던 그 엄청난 발명품의 진가를 알아보았다는 거다.

p. 62


05 김용옥의 크로스 텍스트와 이어령의 하이퍼텍스트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같은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객관성',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와야 한다는 '신뢰성',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 그리고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 및 '비교 가능성'이다.

p. 68


'IT혁명'이라며 다들 '디지털'을 이야기하고 흥분할 때, 이어령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인 '디지로그'를 이야기했다. 디지털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다. 나는 학생들에게 그의 디지로그 개념을 '비데와 휴지'로 설명한다. 비데가 나왔다고 화장실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오히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 개념의 핵심은 디지털의 발전이 아날로그의 변화를 가져오고, 아날로그는 여전히 디지털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p. 74


06 노트와 카드의 차이는 엄청나다


'노트'와 '카드',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이다. 카드는 자기 필요에 따라 다양한 편집이 가능한 반면, 노트는 편집이 불가능하다.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것을 하나로 표현하라면 바로 이 편집 가능성이다. 그게 전부다. 예를 들면 이런식이다. 프로이트의 책을 읽으며,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내용을 카드에 정리한다. 카드 맨 위에는 키워들 적고, 그 밑에는 그것과 연관된 개념(요즘으로 식으로 인터넷의 '연관 검색어')을 적고, 출처와 날짜 등을 차례로 적는다. 그리고 카드의 앞 뒷장에 그 내용을 빼곡히 요약한다.

p. 87


네이버는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막연히 원하는 것을 구체화했다. 왜 사람들이 카페를 만들고 모이려 하는지, 그 무의식적 동기를 시스템적으로 구현했다. 지식을 찾고, 제공하고, 공유하는 '지식 검색'이다. 네이버의 지식 검색은 무한한 편집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아울러 '블로그'를 통해 사람들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던 데이터베이스를 각자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p. 90


07 편집 가능성이 있어야 좋은 지식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상호작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은 정서 공유를 통한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동기는 관심의 공유, 즉 지식과 정보의 공유다. 쉽게 말해, 공부하고 싶다는 거다.

p. 95


'학교'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스콜레'다. 스콜레는 '여가를 즐기는 것' '교양을 쌓는 것' 등을 뜻한다. 그러니까 공부한다는 것은 본래 '삶을 즐기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가장 행복한 것은 공부하는 거다. 노후의 가장 훌륭한 대책도 뭔가를 배우는 거다.

p. 95


좋은 지식의 기준은 '편집 가능성'에 있다. 현재진행형의 세계와 상호 작용하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주체적 행위가 가능한 지식이 좋은 지식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는 지식이 좋은 지식인 것이다.

p. 105


08 예능 프로그램은 자막으로 완성된다


예능은 원래 예술적 능력을 지칭하거나 연극, 영화, 음악 등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일컫는 단어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재미있는 TV 프로그램'의 뜻으로만 쓰인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능은 상당히 헷갈리는 용어다. 도무지 기준이 애매하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예능 프로그램이고, 어디부터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닌 것일까?

p. 108


<무한도전>이 그토록 오랫동안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자막의 힘에 있다. ... 수십 대의 카메라가 녹화한 화면을 오직 하나의 화면으로 편집해내야 하는 PD나 영화감독은 이 시대 최고의 편집자다. 뛰어난 에디톨로지적 능력을 발휘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제7의 멤버'로 불리는 <무한도전>의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이제까지 우리가 봐왔던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토록 인기가 있는 거다.

p. 110


09 연기력이 형편 없는 배우도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이유

10 클래식을 좋아한다면 절대 카라얀을 욕하면 안 된다


지휘자는 '시간의 편집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아무도  상상치 못한,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킨 이가 바로 카라얀이다. 지휘의 에디톨로지를 시간의 편집에서 이미지의 편집으로, 혁명적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다.

p. 128


음악을 귀로만 듣는 것이 아라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눈치챈 카라얀은 음악과 영상의 편집을 시도한다. 사람들은 카라얀이 세계 최초의 뮤직비디오 제작자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뿐만 아니다. 스스로 예술 감독, 영상 감독을 자처한다. 1965년 예술 감독으로 오페라 <라보엠>을 찍은 후, 1967년에는 오페라 <카르멘>의 연주를 본인이 직접 감독한다.

p. 132


PART 02. 관점과 장소의 에디톨로지

01 관점의 발견과 서구 합리성의 신화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을 배우는 일이다. ... 인문학은 나와 다른 시선에 대한 관용과 이해를 전제로 한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인정하는 일이다.

p. 136


짜증이 난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과부하가 걸렸다는 의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번아웃'이라고 한다. 에너지가 다 소진되었다는 뜻이다.

p. 139


02 우리는 윈도(창문)로 세상을 개관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수태고지>에 숨겨진 비밀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소실점이 변한다'는 것이었다. ... 도대체 다 빈치는 왜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여러 가설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이 그림이 걸려 있던 위치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원래 이 그림은 큰 성당의 앞쪽 높은 벽에 걸려 있었다는 거다. 아무도 그 그림을 정면에서 볼 수 없었다. 앞쪽에는 제단이 있어 접근이 불가능했다. 오른쪽 아래에서 그림을 올려다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 반치는 '이 그림을 누가 어디서 보는가'를 고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 <수태고지>에는 '객관성은 주관성을 전제로 한다'는 변증법적 모순이 숨겨져 있다. 20세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버금가는 혁명적 인식론이다.

p. 153


오늘날 모든 기업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은 인간 인식에 관한 문명사적 통찰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객관적 합리적 사고의 시작을 알리는 원급법의 발견이 주체와 객체의 문제, 주체들 간의 소통 문제로 그 논의가 확대되는 것처럼, 생산자와 소비자 간의 관계는 철학적 인식론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인문학을 아주 치밀하게 공부해야 하는 거다.

p. 155


03 원근법은 통제 강박이다


좌표가 잡히지 않는 공간은 '공포'다. ... 어디로 흐르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은 더 큰 공포다.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이 불안을 견디지 못해 인간은 '여기와 지금'이라고 하는, 존재의 확인을 위한 좌표를 정하기 시작한다.

p. 158


기껏해야 도자기나 천에다 문양을 그려 넣던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소유한 땅에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공간적 규칙이 구현된 '정원'이다. 자기 소유의 땅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은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특히 권력이 집중되어 있는 궁전에는 항상 정원이 있었다. ... 단순히 절대권력의 과시를 위해서가 아니다. 불안해서 그렇다. 언제 절대권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그 엄청난 정원을 만든 것이다.

p. 162


서양의 선원근법과 <책가도>에 나타난 역원근법의 차이는 단순한 회화 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인식론의 차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역원근법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반대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내게 가까울수록 작아지고, 내 반대편에 있는 타인의 시선에 가까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p. 168


<책가도> 또는 일본 전통 회화의 다양한 묘사 방식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3차원을 2차원으로 편집하는 방법은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회화 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다.

p. 172


04 권력은 선글라스를 쓴다!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선을 소유할 수 있다. 고궁에 들어가 보면, 왕의 의자는 항상 가장 높은 곳에 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도. 각종 국가 행사에서 대통령의 의자는 가장 높고, 정 가운데 있다. 원근법의 소실점처럼 절차의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p. 176


삶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시선을 구매한다. 오늘날 '조망권'이라는 애매한 권리가 법적 다툼이 되는 이유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p. 177


별장도 없고, 풍광 좋은 조망도 소유할 수 없는 사람들은 주말마다 산에 오른다. 단순히 건강에만 좋으라고 산에 오르는 게 아니다. 그저 건강만 생각한다면 산 중턱까지 오르락내리락하지 뭐하러 매번 죽어라 정상에 오르겠는가?

p. 177


05 시대마다 지역마다 달라지는 객관적(?) 세계지도

06 공간 편집에 따라 인간 심리는 달라진다!


앉는 위치와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에 따라서도 상호작용의 내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테이블에서 서로 마주 보고 앉는 경우와 모서리를 끼고 기역자로 붙어 앉는 경우는 대화 내용이나 상호작용의 밀도가 질적으로 달라진다.

p. 206


우리가 문화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많은 부분은 공간 의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각 문화의 특징을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해당 문화의 공간 편집 방식을 살펴 보는 것이다. ... 회사의 공간 배치를 바꾸거나 집의 인테리어를 바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공간의 구조가 바뀌면 태도가 바뀐다. 출입문의 위치만 바뀌어도 사람들의 동선이 바뀌고, 공간 내의 상호작용 양상이 변화된다. 문화는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작동한다.

p. 212


07 독일인들의 공간 박탈감이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이다!

08 19세기 프로이센 군대와 축구의 공간 편집


텅 빈 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 공간에 아주 작은 점 하나라도 찍혀야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 그러나 공간에 점을 하나 찍는 것만으로 의미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두 개 이상의 점을 찍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점과 점 사이를 연결하는 심리적 선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공간을 통제하기 위해서다. 별자리가 그 예다. 그 무한한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해 사람들은 별자리를 만들어냈다. 아무 관계 없이 공간적으로 서로 떨어져 있는 별들을 이어 선을 긋고, 그 선들을 모아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곰, 물고기, 쌍둥이, 사자 등등. 하늘에 다양한 그림이 그려지자 사람들은 그 막막하고 캄캄한 밤하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p. 228


09 제식훈련과 제복 페티시

10 분류와 편집의 진화, 백화점과 편집숍


백화점이 가져온 문화 충격은 진열과 전시 방식에 있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백화점의 문화 충격은 '상품 분류'에 대한 충격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물건이 이토록 분명하고도 간결하게 공간적으로 분류되어 자리 잡고 있음에 감동했다.

p. 250 


편집숍은 다르다. 상호작용적이다. 어느 한쪽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물건을 꼭 사지 않아도 된다. 편집숍의 주인은 고객이 자신의 편집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편집숍의 즐거움은 에디톨로지적이다. 그래서 편집숍이 늘어서 있는 신사동 가로수길이나 홍대앞을 걷는 것이 재미있고 즐거운 거다.

p. 254


PART 03. 마음과 심리학의 에디톨로지

01 개인은 편집된 개념이다


서구의 근대를 가능케 한 'culture' 'society' 'individual'에 조응하는 개념이 과거 동양에는 없었다. 이들 개념의 번역인 '문화' '사회' '개인'과 같은 단어는 일본 메이지 시대 지식인들이 만들어냈다. 이 개념들을 오늘날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된 것은 고작 100여 년에 불과하다.

p. 260


02 ‘나’는 내 기억이 편집된 결과다!


인간은 텍스트롤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가 바로 '나'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아이덴티티, 즉 자기 정체성이라고 정의한다. 내가 이야기하는 나를 자기 자신으로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구성된다는 거다.

p. 275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내러티브는 진리를 강요할 뿐, 일리의 해석학이 빠져 있다. 반면 스티브 잡스의 내러티브는 상호작용적이다. 편집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p. 282


03 우리는 왜 백인에게는 친절하고, 동남아인에게는 무례할까?

04 천재는 태어나지 않는다. 편집될 뿐이다!


세계사의 모든 영웅은 일찍 죽었다. 큰 업적을 남기고는 바로 죽어야 영웅이 된다. 멀리는 알렉산더 대왕부터 가까이는 이소룡과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죄다 일찍 죽었다. 늙은 영웅은 없다. 일찍 죽어야 사람들은 느닷없는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p. 294


대부분 천재의 삶에는 행복이 빠져있다. '행복한 천재'는 없다. 대신 유명하다. 행복은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수식어다. 천재면서 행복하기까지 바라면 안 된다. 그래서 영재 교육을 쫒아다니는 부모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원하는 대로 자기 자식이 유명한 사람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행복한 사람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p. 295


사람들은 천재의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재나 신동은 타고난다. 그러나 그들이 반드시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그들의 특별한 능력이 사회적 요구와 맞물려 빛을 발할 수 있어야 천재가 되는 것이다.

p. 296


신동 모차르트가 성인이 되어서도 천재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수공업자의 예술'에서 '예술가의 예술'로의 전화이라는 시대적 맥락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엘리아스의 통찰이다.

p. 301


안정된 사회에서 천재는 나타나기 어렵다. 안정된 사회란 발달 과정이 정형화된 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피카소의 천재적 예술 작품은 '표상'으로서의 미술이 사진이라는 기계적 수단에 의해 위협받던 시대의 산물이고, 스티브 잡스와 같은 천재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아주 우연하게 한 개인에게 깔때기처럼 모인 결과다.

p. 303


05 미국은 국가國歌로 편집되는 국가國家다


민족은 근대 이후에야 기능하기 시작한 가공의 이념이다. 그 이전에는 왕의 국가, 신의 국가였을 따름이다. 절대왕권이 사라진 이후, 국가를 지속하게 할 이념으로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나타난 것이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선왕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1900년대 이후에나 민족 개념이 나타났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한 저항의 이념으로 우리의 '민족' 개념은 편집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오늘날 세계화의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상상 공동체는 해체되고 있다. 민족 개념 자체가 부정적 개념으로 변하고 있다.

p. 307


06 심리학의 발상지 독일에서 심리학은 흥행할 수 없었다


포스트모더니티의 핵심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고 규정한다. 근대 후기의 성과 사회는 각 개인을 끊임없이 자기 착취의 나르시스적 장애로 몰아넣는다. 타인에 의한 착취가 아니라 '자발적 자기 착취'다.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주체는 죽을 때까지 안정된 자아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런 후기 근대적 주체의 미완결적 성격은 자신을 태워버리는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p. 322


서점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항상 줄지어 있는 자기계발서, 성공처세서의 핵심은 아주 단순하다. '넌 무엇이든 할 수 있어!'라는 속삭임이다. 여기에는 물론 또 다른 전제가 붙는다. '열심히 하면......'.

p. 323


07 프로이트는 순 사기꾼이었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때에 따라 왜곡 또는 편집된다고 해서 인간이 불행해지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불완전한 기억 때문에 인간이 위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p. 328


추상화야말로 인간의 가장 창조적인 능력이다. 인간의 생각이 대상의 모방에 그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를 편집해낼 수 있는 것은 추상화 능력 덕분이다.

p. 329


08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는 위대한 편집자였다!

09 항문기 고착의 일본인과 구강기 고착의 한국인


지나친 배변 훈련은 아기에게 어떤 식으로든 정신적 상처를 남기게 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리자면, '항문기 고착'이라는 퇴행 현상이다. 일본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청결에 대한 이 집요한 강박은 결국 항문기 고착의 성격적 특징이라고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p. 358


10 책은 끝까지 읽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독일에서 배운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이렇다. '공부는 데이터베이스 관리다.'

p. 361


발췌해서 내가 읽고 싶은 것만 찾아 읽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읽은 싶은 것이 뭐냐는 거다. 내 질문이 없으니,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것이다.

p. 366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다. 내 질문이 없고 내 생각이 없으니, 모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있는 것이다.

p. 367


목차와 찾아보기는 주체적 독서를 하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주체적 책 읽기'란 왜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목적이 분명함을 뜻한다. 주체적 책 읽기는 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책을 들춰 목차를 볼 때, 내 눈길을 끄는 개념들이 있다며 그 책을 선택하게 된다. 책 내용을 대충 훑어볼 때, 흥미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그 부분을 잠시 읽게 된다. 그리고 저자 이력이나 찾아보기, 참고문헌 목록을 보며 책의 구입 여부를 결정한다.

p. 367


독서는 내가 가진 개념과 저자의 개념이 편집되는 에디톨로지 과정이다. 그래야만 저자의 생각이 내 생각의 일부가 된다. 우리는 저자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 절대 아니다.

p. 368


에필로그 |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아주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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