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글감옥, 조정래 지음, 시사인북
태백산맥 마지막 10권을 덥자마자 벌교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다음 날 가장 빨리 있는 기차를 타고 무작정 벌교에 갔다. 벌교역에 내린 후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소설 태백산맥의 곳곳을 더듬었다. 놀랍게도 처음 가본 곳이었음에도 낯설지가 않았다. 소설 속에 푹 빠져서 내리 읽어낸 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의 감정 때문이었을까. '홍교'위에 김범우가 서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도 한동안 태백산맥의 여운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 감정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있다.
소설을 쓴 작가도 그 소설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한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대하소설 3편을 20년동안 집필했으니 작가 조정래는 20년 그 이상을 소설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작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3편을 쓰는 20년동안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리고 태백산맥 10권, 아리랑 12권, 한강 10권은 어떻게 씌여 졌을까. 책을 읽은 독자라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이 소설을 쓴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함께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던 독자라면 그에 대한 진지한 답을 '황홀한 글감옥'에서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대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태로 되어 있다. 작가 조정래에게 궁금했던 질문 500여 개를 받았고, 그 중 84개 추려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했다.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이지만 조정래의 문학론, 작품론, 인생론 등 다양한 내용을 작가 본인의 글로 만나 볼 수 있다.
에세이 또는 자전적 소설이라는 표지의 글 처럼 보통의 인터뷰와 같은 형태는 아니다. 인터뷰어가 주도하고 정리하는 일반적인 형식의 인터뷰 정리가 아니고, 던져진 질문을 시작점으로해서 자연스럽게 질문 내용과 본인 이야기 그리고 작품 이야기 등을 풀어나가는 구성 형식이다. 작가의 주도적인 글쓰기는 어렵지 않게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하고, 마치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재미를 준다.
작가 조정래는 어릴적부터 글짓기에 재능을 보였다. 친구들이 2줄 쓰고 쓸게 없었던 방학숙제 일기를 조정래는 끊임없이 묘사하며 써낼 수 있었고, 또 자기가 쓴 글로 문집을 만들정도로 글쓰기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쓰기가 재능과 별개로 얼마나 치열했는가는 책 본문의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도 어느 일면 기술인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술은 거듭되는 연습으로 점점 나아지고, 계속 노력하면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가며 숙달되고, 그 숙달이 어느 경지에 이르러 확고한 세계를 이룩하면 장인의 대접을 받게 됩니다. 글쓰기도 그런 식의 노력을 치열하게 바치면 점점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됩니다.
"500권의 책을 읽지 않고서는 소설을 쓰려고 펜을 들지 말라."
그 5백 권의 책이란 세계문학전집 1백 권, 한국문학전집 1백 권, 중 단편소설 1백 권, 시집 1백 권, 기타 역사 사회학 서적 1백 권입니다. 그것도 한 차례씩만 읽고 말 것이 아니라 5년을 주기로 되풀이해서 읽으면 그보다 더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그때그때 발간되는 신간을 골라 읽는 꾸준한 독서 생활을 글쓰기와 병행해야 하는 건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질문자에 대한 답변형태의 조언이지만 다시 보면 작가 스스로 글쓰기의 노력이 얼마나 치열했는가 그리고 소설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고 정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단행본 10권 태백산맥을 구성노트도 없이 이름이 적힌 몇장의 종이로 쓸 정도의 내공은 그의 재능과 함께 피나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인 것이다.
문학의 길을 가고자 하지만 재능을 의심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어야 한다. 대작은 그냥 쉽게 나오는게 아니라 작가의 엄청난 노력과 성실함으로 탄생한다는 것을 글을 통한 간접 체험을 통해서라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자기의 부족한 재능을 가늠해보고 그 부족한 부분을 노력으로 매꿀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소설을 읽은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다. 소설을 통해서만 만났던 작가 조정래의 내면을 이야기가 아닌 사실로 직접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아는가. 이 책을 통해 소설을 다시 읽게되고 지난날 지나쳤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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