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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멀랜다 2017. 10. 17.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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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문장 : 다시 사는 삶을 위하여 

김정선, 유유출판, 2016 


소설의 첫문장 책 사진



모든 존재에는 시작이 있다. 시작이 있어야 다음이 있다. 시작이 있어야 존재하게 되고, 그 존재는 다음과 연결돼 의미가 된다. 작가가 온전히 창작하는 소설의 영역에도 시작이 있다. 소설의 시작 첫 문장. 그 첫 문장은 전체 서사를 시작하는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한 편의 탄탄한 소설을 위해 첫 문장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 '칼의 노래'에서 김훈 작가가 첫 문장을 장고 끝에 결정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할지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할지 오래 고민했는데 '꽃이 피었다'를 선택했다고. 이후 소설 문장은 '꽃피는 숲에 저녁노을이 비치어, 구름처럼 부풀어오른 섬들은 바다에 결박된 사슬을 풀고 어두워지는 수평선 너머로 흘러가는 듯 싶었다'로 연결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소설 '남한산성'은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로 시작한다. 김훈 작가가 스스로 잘된 문장이라 평가하는 첫 문장이다. 정치적 언어의 허망함 그리고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중적인 뻔뻔함을 한마디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JTBC 손석희 뉴스룸 인터뷰에서 밝힌바 있다.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쓴 김영하 작가도 첫 문장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소설을 시작하려면 최소한 첫 문장과 첫 단락은 마음에 들어야 해요.'라고 산문집 '말하다'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작가의 서랍에는 첫 단락만 쓰고 버려둔 소설들이 가득하다고 하는데 '살인자의 기억법'도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결국 그 소설은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로 시작한다. 


이쯤되면 세상의 모든 이야기인 소설의 첫 문장이 궁금해진다. 작가의 고민은 어떤 문장으로 귀결되었을까. 






이책은 소설의 첫 문장 242개를 모아 소개하고 있다. '소설의 첫 문장들만 모아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시작된 의도는 소설의 문장을 소개하고, 저자의 문장을 함께 엮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책의 구성은 소설의 첫 문장을 구별해서 소개하고, 첫 문장 옆에 짧은 이야기를 달아 놓은 형식을 취했다. 저자의 짧은 글에는 소설의 첫 문장과 관련된 이야기, 개인적인 상념, 소설을 읽은 감상 등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적고 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01.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출간되고 얼마 안 되었을 무렵. ... 여학생 둘이 한 문장씩 돌아가며 읽고 있었다. 시집을 읽는구나 했더랬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슬쩍 뒷좌석을 보니 여학생들 손에 들린 책은 시집이 아니라 "칼의 노래"였다. 내가 시의 한 구절이려니 여겼던 문장이 바로 소설의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문학동네, 2013.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를 ... 넣어서, 말하자면 굳이 문장의 초점을 흐릿하게 만들어서, 불편함을 누그러뜨렸다. 베테랑의 문장답다. 아니 베테랑의 태도답다고 하려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안나카레리나, 문학동네, 2010. 


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삶도 죽음도. 물론 그사이에서 겪는 행복과 불행의 모습도 다르고, 그 행불행을 함께하는 사람달의 마음까지도 제각각이다. 



나는 고양이다. 

나쓰메 소세키, 송태욱 옮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현암사, 2013. 


나는 침대다. 

최수철, 침대, 문학과지성사, 2011. 


'나는 대체 뭐하는 놈일까?' 이럴 땐 저 두 문장처럼 고양이든 침대든 정확하고 분명한 술어가 간절해진다. 언제 어디서든 또 누구에게든 주저 없이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존재.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마냥 부러워진달까.



소설의 첫 문장은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와 같이 시 처럼 느껴지는 문장, '벌써 25년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처럼 큰 서사를 암시하는 문장, '나는 고양이다'라고 직설적으로 주인공을 정의하는 문장 등 다양하다. 이 다양한 문장에는 묘한 설렘이 느껴지는 힘이있다. 이야기를 시작하는 문장이 이렇게 두근거림이 있다는 것을 처음 느껴본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소설 첫 문장에 덧붙인 저자의 자유로운 글이 종종 소설의 문장과 잘 섞이지 않는 다는 점. 글이 자유롭다 보니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다 가끔 길을 잃는 느낌이 든다. 저자의 글을 주제별 또는 구성별로 나눴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소설을 즐겨읽는 독자라면 한 권 소장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소설을 읽은 후 한 문장으로 복기할만한 문장들이 많이 담겨있다. 또 한 문장만 봐도 그 소설의 서사가 펼쳐지는 놀라움도 느낄 수 있다. 


습작을 하는 작가 지망생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시대와 시간을 뛰어넘어 남아있을 문장, 그리고 그 문장을 만들어 낸 소설가의 영감이 축약된 책이다. 242개의 압축된 영감. 혹시 아는가, 시대와 시간 그리고 소설가를 뛰어넘은 영감이 습작하는 그대에게도 거짓말처럼 나타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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